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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遺敎經(불유교경)

까마귀마을 2024. 12. 1. 08:45

 

불유교경 

부처님 생애 마지막 순간에 부처님의 유언을 기록해놓은 대승경전이다. 산스크리트 원전이나 티베트어본은 전하지 않고, 5세기 초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의 한역본만 전한다. 그러나 주소본(註疏本)은 매우 많다. 경의 원명은 불수반열반약설교계경(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이고, 불수반열반교계경(佛垂般涅槃敎誡經), 불수열반약계경(佛垂涅槃略誡經), 유교경(遺敎經) 등으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나 일본까지 불유교경은 총림에서 스님들의 필습(必習)의 기본경전일 만큼 중요하고 비중 있게 다루는 경전이다.

 

열반경과 달리 부처님 입멸 후 비구들의 계율 준수를 강조하고 있다.

① 물건을 사고파는 상거래행위 ― 비구들은 상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② 재물을 축적하는 행위

③ 길흉을 점치는 행위

④ 천문지리를 보는 음양 주술적 행위

⑤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행위

⑥ 신통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행위 등을 금하라고 당부했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계율 조문(条文)만을 )를 스승으로 삼아서 계를 지키고 정()을 닦아 깨달음의 지혜를 얻을 것을 당부한 최후의 가르침으로 해탈을 얻어 무명의 암흑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그리고 수행자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 덕목(八大人覺)을 밝혔다.

① 계율을 잘 지켜라.

② 항상 마음을 억제하라.

③ 교만하지 말라.

④ 아첨하지 말고 헛된 욕심을 내지 말라.

⑤ 자기 분수를 알라.

⑥ 항상 음식을 조심하라.

⑦ 잠을 많이 자지 말라.

⑧ 성내지 말라.

 

후한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번역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과 당()의 위산 영우(潙山靈祐)가 지은 위산경책(潙山警策), 그리고 이 불유교경(佛遺敎經)을 합쳐서 불조삼경(佛祖三經)이라고 한다.

 

경전은 대개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 등 세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서분은 경을 설하게 되는 동기이고, 정종분은 그 경의 중심내용이며, 유통분은 결론과 같은 부분이다. 불유교경도 그렇게 세 부분으로 돼있다.

 

서분(序分)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최초의 설법으로 교진여 등을 제도하시고, 최후의 설법으로 수발타라를 제도해 인연 있는 중생들 모두 제도하심으로써 제도할 사람은 모두 제도하시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명을 마치시고 쿠시나가라의 숲 속 사라쌍수 아래에서 입멸 직전에 마지막 가르침을 설하려 하는 정경을 보여준다.

 

정종분(正宗分)은 핵심 내용으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열심히 수행해서 생사고(生死苦)에서 해탈하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육성이 간절하게 실려 있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생사의 고()에서 해탈케 하기 위해 대비심으로 간절히 수행하기를 권하셨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때문에 세상은 무상하고 위태롭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실로 여유를 가질 여가가 없다고 경고하시면서 오로지 간절히 수행하기를 제자에게 당부하셨다.

이것이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가르침이다. 불유교경의 내용은 오로지 수행 정진하라는 부처님 말씀뿐이다.

 

그러면 수행법은 무엇인가?

바로 계()⋅정()⋅혜() 삼학(三學)이다. 여기서 벗어난 다른 불교 수행의 길은 없다. 불유교경의 내용도 바로 이 삼학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부처님은 당신이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에게 마땅히 계()를 스승으로 삼고 수행할 것을 제일 먼저 말씀하셨다. 말 그대로 삼학 중 먼저 계를 가지는 것부터 수행이 시작됨을 말한다.

그 이유는, ()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낳고, 해탈(解脫)을 이루는 근본이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정종분의 시작이자 주된 골격이다.

 

깨침에 도달하는 수행의 길은 삼학 중 혜()에 의해 이루어진다.

혜는 선심(善心)에 의해서만 작용한다. ()를 지켜야 착한 마음이 생기고 커진다. 계의 성질이 그릇된 것을 막는 방비지악(防非止惡)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는 혜()가 나타날 수 있는 기반이라면 선정(禪定)은 혜()가 활동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선정의 깊이에 따라 지혜도 깊어지고 힘이 강해진다.

혜의 작용은 번뇌를 그 뿌리까지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이 점점 높아지는 길은 바로 이 혜가 번뇌의 잡초를 제거하면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 상에서는 혜가 계와 정을 바탕으로 해서 번뇌 속에서 번뇌를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바로 수행의 길을 개척하고 궁극에 가서 정각(正覺)을 이루어 열반(涅槃)의 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정은 단지 번뇌를 제어할 정도이지, 무명과 번뇌를 죽이지는 못한다. 마치 큰 돌로 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눌러놓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혜는 풀의 뿌리까지 잘라버리는 날카로운 칼이다.

물론 계()⋅정()⋅혜()는 서로 분리돼있는 것이 아니다. ()⋅정()⋅혜()는 한 몸이라는 것 삼학동전(三學同轉)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계로써 스승으로 삼고, 선정의 힘으로 번뇌를 제압하고, 혜의 공덕으로 번뇌를 멸하는 것이 불유교졍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의 목적이 생로병사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는 것인 만큼, 고해(苦海)에서 벗어나는 오직 한 가지 길인 수행체계가 바로 사성제(四聖諦 : 고(苦)·집(集)·멸(滅)·도(道)이다.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스승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사람들이 부처님이라고 부릅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바로 네 가지 진리에 대해 완전한 지혜를 갖췄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알아야 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노라.”

 

말하자면, 이러한 사성제의 가르침은 곧 중생이 부처가 되는 유일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최초의 설법도, 최후의 가르침도 바로 이 사성제인 것이다.

따라서 정종분의 삼학(三學)은 바로 사성제 중 도성제(道聖諦)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결론 부분인 유통분(流通分)에서 사성제에 대해 의심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제자에게 간곡히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서분(序分)에서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까지 관통하고 있는 것은 계⋅정⋅혜 삼학의 수행도(修行道)이고, 사성제의 수행체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불유교경 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행도와 수행체계에 의지해 생사의 고해를 건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고 대비심(大悲心)이다.

 

사성제(四聖諦) : 사제(四䜞)라고도 함.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사제설은 인연설을 알기 쉽게 타인에게 알리기 위해 체계를 세운 법문이다. 십이연기설이 이론적인 것임에 대해 사제설은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것이며, 오히려 실천을 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성도 후 좌선사유(坐禪思惟)에 의해 스스로의 깨침을 즐겼으나, 인연의 이치가 매우 어려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설법 방법을 연구하여 사제설을 고안하였다. 그가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比丘)를 상대로 처음 설법한 것이 사제의 가르침이다.

사제의 첫째는 고제(苦諦)이다. 고제는 불완전하고 더러움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 고(苦)는 구체적으로 8苦를 말하는데 생·노·병·사(生老病死)의 4고(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성고(五蘊盛苦)의 네 가지를 합한 것을 말한다.

둘째는 집제(集諦)이다. 집이란 집기(集起), 즉 사물이 모여 일어나기 위한 원인이므로 고의 원인이나 이유라는 뜻이 된다. 고의 원인으로서 도처에서 열락(悅樂)을 추구하여 그치지 않는 갈애(渴愛)를 뜻하는데, 십이연기설에서는 무명(無明)과 갈애를 고뇌의 원인으로 함께 보고 있다. 갈애는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갈애는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의 삼애(三愛)가 있다. 욕애는 감각적 욕구인 오욕(五欲)에 대한 갈애로서, 현실에 있어서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애욕을 말한다. 유애는 존재를 뜻하는 유(有)에 대한 갈애로서, 사후에 천국 등의 훌륭한 곳에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이다.

셋째는 멸제(滅諦)이다. 멸제는 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향인 열반(涅槃)의 세계를 가리킨다. 즉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해탈을 얻음을 말한다.

넷째는 도제(道諦)이다. 도는 이상향인 열반에 도달하는 원인으로서의 수행방법이며,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여덟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팔정도는 바르게 보는 正見, 바르게 생각하고 正思惟, 바르게 말하고 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正命, 바르게 노력하고 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 正念 ,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正定, 수행법이다.

사제 중의 고는 생사과(生死果)이고, 

집은 생사인(生死因)이며, 

멸은 열반과(涅槃果)이다. 

이는 다시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열기(還滅緣起)의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두 가지는 생사유전의 고통과 그 원인을 말하고 멸과 도의 두 가지는 유전을 벗어나 무고안온(無故安穩)의 열반과에 도달할 수 있는 환멸의 수행법을 말한다. 그러나 후기의 학자들은 성문(聲聞)이 고집하는 사제의 견해를 파(破)하기 위하여 일체의 제법(諸法)이 공적(空寂)하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고·집·멸·도가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집착을 깨뜨려서 사제의 진의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선가(禪家)에서는 사제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고제는 한 생각 물든 마음이 생기는 것을 뜻하고, 집제는 그 생각이 거듭 이어지는 것을 뜻하며,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멸제라 하고, 멸이 멸하지 않음을 철저히 아는 것을 도제라고 하였다. 즉 사제를 모두 한 생각에 둔 것이다.

 

십이연기 :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을 인연하여 촉(觸)이 있고, 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를 인연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인연하여 취(取)가 있고,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고, 유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노병사와 우비고뇌(늙음·병·죽음과 근심·걱정·고통·번민)가 있다.

 
佛遺敎經 原文

釋迦牟尼佛初轉法輪,度阿若憍陳如,最後說法度須跋陀羅,所應度者皆已度訖,於娑羅雙樹間將入涅槃。是時中夜寂然無聲,為諸弟子略說法要:「汝等比丘,於我滅後,當尊重珍敬波羅提木叉。如闇遇明、貧人得寶,當知此則是汝大師,若我住世無異此也。

持淨戒者,不得販賣貿易、安置田宅、畜養人民奴婢畜生,一切種殖及諸財寶,皆當遠離如避火坑。不得斬伐草木、墾土掘地,合和湯藥、占相吉凶、仰觀星宿推步盈虛曆數算計,皆所不應。節身時食清淨自活,不得參預世事通致使命,呪術仙藥、結好貴人親厚媟嫚,皆不應作。當自端心正念求度,不得苞藏瑕疵、顯異惑眾。於四供養知量知足,趣得供事不應稸積,

此則略說持戒之相。戒是正順解脫之本,故名波羅提木叉。依因此戒,得生諸禪定及滅苦智慧。是故比丘,當持淨戒勿令毀犯。若人能持淨戒,是則能有善法。若無淨戒,諸善功德皆不得生。是以當知,戒為第一安隱功德之所住處。

汝等比丘,已能住戒當制五根,勿令放逸入於五欲。譬如牧牛之人執杖視之,不令縱逸犯人苗稼;若縱五根,非唯五欲將無崖畔不可制也,亦如惡馬不以轡制,將當牽人墜於坑陷,

如被劫害苦止一世;五根賊禍殃及累世,為害甚重,不可不慎。是故智者制而不隨,持之如賊不令縱逸;假令縱之,皆亦不久見其磨滅。

此五根者,心為其主。是故汝等當好制心,心之可畏,甚於毒蛇、惡獸怨賊、大火越逸,未足喻也,動轉輕躁,但觀於蜜不見深坑,譬如狂象無鈎,猿猴得樹騰躍跳躑,難可禁制,當急挫之無令放逸。縱此心者喪人善事,制之一處無事不辦。是故比丘,當勤精進折伏其心。

汝等比丘,受諸飲食當如服藥,於好於惡勿生增減,趣得支身以除飢渴。如蜂採花,但取其味不損色香。比丘亦爾,受人供養取自除惱,無得多求壞其善心。譬如智者籌量牛力所堪多少,不令過分以竭其力。

汝等比丘,晝則勤心修習善法無令失時,初夜後夜亦勿有廢,中夜誦經以自消息,無以睡眠因緣令一生空過無所得也。當念無常之火燒諸世間,早求自度勿睡眠也。諸煩惱賊常伺殺人,甚於怨家,安可睡眠不自驚寤?

煩惱毒蛇睡在汝心,譬如黑蚖在汝室睡,當以持戒之鉤早摒除之。睡蛇既出乃可安眠,不出而眠是無慚人也。

慚恥之服,於諸莊嚴最為第一,慚如鐵鉤,能制人非法。是故比丘,常當慚恥,無得暫替,若離慚恥則失諸功德。有愧之人則有善法;若無愧者,與諸禽獸無相異也。

汝等比丘,若有人來節節支解,當自攝心無令瞋恨,亦當護口勿出惡言,若縱恚心則自妨道、失功德利。忍之為德,持戒苦行所不能及。能行忍者乃可名為有力大人;

若其不能歡喜忍受惡罵之毒如飲甘露者,不名入道智慧人也。所以者何?瞋恚之害能破諸善法、壞好名聞,今世後世人不憙見。當知瞋心甚於猛火,常當防護無令得入,劫功德賊無過瞋恚。白衣受欲非行道人,無法自制,瞋猶可恕;出家行道無欲之人,而懷瞋恚,甚不可也。譬如清冷雲中霹靂起火,非所應也。

汝等比丘,當自摩頭,已捨飾好著壞色衣,執持應器以乞自活,自見如是,若起憍慢當疾滅之。謂長憍慢尚非世俗白衣所宜,何況出家入道之人,為解脫故自降其心而行乞耶?

汝等比丘,諂曲之心與道相違,是故宜應質直其心。當知諂曲但為欺誑,入道之人則無是處。是故汝等,宜應端心以質直為本。

汝等比丘,當知多欲之人多求利故,苦惱亦多;少欲之人無求無欲,則無此患。直爾少欲尚應修習,何況少欲能生諸善功德!少欲之人則無諂曲以求人意,亦復不為諸根所牽。行少欲者,心則坦然無所憂畏,觸事有餘常無不足,有少欲者則有涅槃。是名少欲。

汝等比丘,若欲脫諸苦惱,當觀知足,知足之法即是富樂安隱之處。知足之人,雖臥地上猶為安樂;不知足者,雖處天堂亦不稱意。不知足者雖富而貧,知足之人雖貧而富。不知足者常為五欲所牽,為知足者之所憐愍。是名知足。

汝等比丘,若欲脫諸苦惱,當觀知足,知足之法即是富樂安隱之處。知足之人,雖臥地上猶為安樂;不知足者,雖處天堂亦不稱意。不知足者雖富而貧,知足之人雖貧而富。不知足者常為五欲所牽,為知足者之所憐愍。是名知足。

汝等比丘,若勤精進則事無難者,是故汝等,當勤精進,譬如小水常流則能穿石。若行者之心數數懈廢,譬如鑽火未熱而息,雖欲得火,火難可得。是名精進。

汝等比丘,求善知識、求善護助而不忘念,若不忘念者,諸煩惱賊則不能入,是故汝等,常當攝念在心;若失念者則失諸功德。若念力堅強,雖入五欲賊中不為所害,譬如著鎧入陣則無所畏。是名不忘念。

汝等比丘,若攝心者心則在定,心在定故能知世間生滅法相,是故汝等,常當精勤修集諸定,若得定者心則不亂,譬如惜水之家善治堤塘。行者亦爾,為智慧水故,善修禪定令不漏失。是名為定。

汝等比丘,若有智慧則無貪著,常自省察不令有失,是則於我法中能得解脫;若不爾者,既非道人又非白衣,無所名也。實智慧者,則是度老病死海堅牢船也,亦是無明黑闇大明燈也,一切病苦之良藥也,伐煩惱樹者之利斧也。是故汝等,當以聞思修慧而自增益。若人有智慧之照,雖無天眼而是明見人也。是為智慧。

汝等比丘,若種種戲論其心則亂,雖復出家猶未得脫。是故比丘,當急捨離亂心戲論。若汝欲得寂滅樂者,唯當善滅戲論之患。是名不戲論。

汝等比丘,於諸功德常當一心,捨諸放逸如離怨賊。大悲世尊所欲利益皆以究竟,汝等但當勤而行之。若在山間、若空澤中,若在樹下、閑處靜室,念所受法勿令忘失,常當自勉精進修之,無為空死後致憂悔。我如良醫,知病說藥,服與不服,非醫咎也。又如善導,導人善道,聞之不行,非導過也,

汝等若於苦等四諦有所疑者,可疾問之,無得懷疑不求決也。」爾時世尊如是三唱,人無問者。所以者何?眾無疑故。

爾時阿㝹樓馱觀察眾心而白佛言:「世尊!月可令熱,日可令冷,佛說四諦不可令異。佛說苦諦真實是苦,不可令樂;集真是因,更無異因;苦若滅者即是因滅,因滅故果滅;滅苦之道實是真道,更無餘道。世尊!是諸比丘於四諦中決定無疑。

於此眾中所作未辦者,見佛滅度,當有悲感。若有初入法者,聞佛所說,即皆得度,譬如夜見電光即得見道。若所作已辦、已度苦海者,但作是念:『世尊滅度,一何疾哉!

阿㝹樓馱雖說是語,眾中皆悉了達四聖諦義。世尊欲令此諸大眾皆得堅固,以大悲心復為眾說:

汝等比丘,勿懷憂惱。若我住世一劫會亦當滅,會而不離,終不可得。自利利人法皆具足,若我久住更無所益,應可度者,若天上人間皆悉已度,其未度者,皆亦已作得度因緣。

自今已後,我諸弟子展轉行之,則是如來法身常在而不滅也。是故當知,世皆無常,會必有離,勿懷憂也。世相如是,當勤精進早求解脫,以智慧明滅諸癡闇。世實危脆無牢強者,我今得滅如除惡病,此是應捨罪惡之物,假名為身,沒在生老病死大海,何有智者得除滅之,如殺怨賊而不歡喜?

汝等比丘,常當一心勤求出道,一切世間動不動法,皆是敗壞不安之相。汝等且止,勿得復語,時將欲過,我欲滅度,是我最後之所教誨。

불유교경(佛遺敎經)해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최초의 설법으로 교진여 등을 제도하시고, 최후의 설법으로 수발타라를 제도하시니, 제도할 사람은 모두 제도하시었고, 사라쌍수 사이에서 장차 열반에 들려 하시니, 이 때 한밤중이라 사방은 고요해 아무 소리도 없었다. 모든 제자를 위해 간략하게 법의 요긴한 점을 말씀하셨다. 매우 감동적인 말씀이므로 읽으며 마음으로 다짐하면 좋은 결실이 있을 것이다.

 

​너희 비구들이여,

내가 멸도한 후에 마땅히 바라제목차를 존중하고 보배같이 공경해야 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만난 듯,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 같이 해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너희들의 큰 스승이니, 만약 내가 세상에 머물더라도 이와 다를 것이 없느니라.

 

➀ 깨끗한 계율을 가지는 자는 물건을 사고팔지 말며,

➁ 집이나 논밭을 마련하지 말며,

➂ 사람이나 노예나 짐승을 기르지 말며,

➃ 모든 농사일과 모든 재물을 멀리 하기를 마치 불구덩이를 피하듯 해야 한다.

➄ 초목을 베거나 땅을 개간하지 말라.

➅ 사람의 길흉(吉凶)을 점치거나, 하늘의 별을 보고 점치거나, 세상의 흥망을 점치거나, ()를 놓아 맞추는 일 등을 하지 말라. 모두 해서는 안 될 일들이다.

 

​➀ 몸을 바르게 갖고,

➁ 때를 정해 공양하며,

➂ 청정하게 스스로 계를 지키며 살아야 된다.

➃ 세상일에 참여해 관료의 심부름이나 하는 하수인이 되지 말며,

➄ 주술(呪術)을 부리거나 선약​(仙藥)을 구하지 말며,

➅ 귀인을 사귀어 친한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윗사람에게 버릇없이 굴지 말라. 이러한 일들은 모두 해서는 아니 된다.

 

​➀ 마땅히 자기 마음을 단정히 하고 바른 생각으로 남을 구제할 일이지, 자기 허물을 숨기거나, 이상한 행동으로 대중을 현혹하지 말라.

➁ 음식, 의복, 침구, 의약 등 네 가지 공양의 분량을 알고 만족하게 여기며, 받은 공양거리를 쌓아 두지 말라.

 

​여기서 계()를 가지는 모양을 대략 말하니, 계는 해탈을 바르게 따르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바라제목차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 이 계()를 의지하면 모든 선정을 얻어 고()를 없애고 지혜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은 마땅히 깨끗한 계​()를 가져 어긋나지 않게 해야 된다. 만약 사람이 계를 가지면 능히 좋은 법을 가질 수 있거니와 만약 계가 없으면 모든 선공덕(善功德)이 생길 수 없다. 그러므로 계는 가장 편안하게 공덕(功德)이 머무는 곳임을 알아야 된다.

 

​ 너희들 비구는 이미 능히 계에 머물거든 마땅히 오근(五根)을 제어해야 한다. 마음을 방일시켜 오욕에 들어가지 않게 하라.

*오근(五根)---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

 

비유를 들자면, 소치는 사람이 막대기를 쥐고 소를 주시하면서 날뛰는 소로 하여금 남의 곡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오근을 제멋대로 놓아두면 오욕뿐만 아니라 가려고 하는 곳이 끝이 없어서 제어할 수 없다. 또한 사나운 말과 같아 재갈을 채우지 않으면 장차 사람을 끌어다 흙구덩이에 처박히게 할 것이다. 도둑의 침해를 당하는 것은 그 괴로움이 일생에 그치지만 오근이라는 도적의 화는 그 재앙이 여러 생()에 미치어, 그 피해가 심히 무겁다. 마땅히 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이는 오근을 제어해 그를 따르지 않고, 그것을 잡아두기를 마치 도둑을 잡는 것과 같이 해서 방일하지 않게 한다. 잡아두기를 마치 도둑 잡는 것과 같이 하면 오근 모두가 오래지않아 마멸함을 볼 것이다. 이 오근은 마음이 그 주인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제어해야 된다. 마음은 독사나 맹수, 원수, 큰 불이 넘쳐 번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히 두려운 존재이다.

비유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꿀 그릇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가볍게 움직이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단지 꿀만 보고 발아래의 깊은 구덩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마치 미친 코끼리를 잡아매어 둘 수 있는 쇠로 만든 튼튼한 고삐가 없는 것과 같고, 이리저리 날뛰는 원숭이를 붙잡기 어려운 것과 같다.

 

​마땅히 급히 욕심을 꺾어서 방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 마음을 풀어 놓아버리는 자는 좋은 일들이 사라지되, 마음을 한 곳에 제어하면 갖추지 못할 일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비구는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해 그 자신의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너희 비구들아!

모든 음식을 받을 때에는 마땅히 약을 먹듯이 하고, 좋고 나쁜 음식에 마음을 내지 말고, 다만 몸을 지탱하고, 주리고 목마름을 없애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마치 꿀벌이 꿀을 딸 때에 단지 그 맛만을 취하고 빛깔이나 향기를 다치지 않는 것과 같다.

 

비구도 그와 같이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때에 스스로의 번뇌를 제거하는 것으로 삼을 뿐, 함부로 공양을 많이 구해 공양을 올리는 자의 선한 마음을 무너뜨리지 말라. 비유를 들자면, 지혜 있는 자는 소의 힘이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를 헤아릴 수 있음에 소를 혹사시켜 그 힘을 다 없애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너희 비구들이여,

낮에는 부지런한 마음으로 착한 법을 닦아 익혀서, 때를 잃지 않게 하며, 초저녁과 새벽에도 또한 공부를 멈추지 말 것이며, 한 밤중에도 경전을 읽어서 스스로 소식이 있어야 한다. 수면을 인연해 일생을 아무 소득 없이 헛되이 보내지 말라. 무상(無常)의 불이 모든 세간을 태우고 있음을 잊지 말고 조속히 자기를 구제하고자 한다면 잠자고 싶어 하는 마음을 없애야 할 것이다.

 

모든 번뇌의 도적은 항상 사람을 엿보아 죽이는 것이 원수보다 심하다. 어찌 잠만 자고 스스로 경책해서 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번뇌의 독사가 너의 마음에 잠자고 있으니, 비유하자면, 검은 뱀이 너의 방에 잠자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마땅히 지계의 칼로 빨리 물리쳐 없애야 된다.

 

잠자는 뱀이 이미 나간 뒤에야 비로소 편안히 잠잘 수 있는 것과 같다.

독사가 나가지 않은 데도 잠자고 있는 이는 부끄러워함이 없는 사람이다.

부끄럼의 옷은 모든 장엄 가운데 가장 최고이다.

부끄럼은 마치 철로 만든 갈고리와 같아서 법에 어긋나는 것을 능히 억누른다.

 

그러므로 항상 부끄러워할 줄 알아서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떠나면 모든 공덕을 잃어버린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법이 있거니와,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모든 금수와 다르지 않다.

 

​너희들 비구여,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너의 사지 마디마디를 끊는다 해도,

스스로 마음을 거두어서 성을 내어 한을 품지 말라.

또 입을 보호해 나쁜 말을 하지 말라.

 

만약 성내는 마음을 제멋대로 놓아두면

스스로가 도를 장애해 공덕의 이익을 잃고 만다.

참는 것이 덕이 되는 것은

계를 가지거나 고행하는 것으로도 능히 미칠 수가 없다.

능히 참음을 행하는 자는

곧 힘 있는 대인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

 

​ 만약 더러운 꾸지람의 독을 참고 받아들이기를

마치 감로수를 마시듯이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은

도에 들어간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냄의 해는 모든 선법을 파괴하며,

좋은 명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금세와 후세의 사람들이

기쁘게 보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성내는 마음은 맹렬히 타오르는 불보다 심하다.

항상 막고 보호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된다.

공덕을 빼앗는 도적에는 성냄보다 앞서가는 것이 없다.

 

재가자는 욕심을 받아들이므로 도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를 제어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성냄도 오히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출가해 도를 행하는 욕심 없는 사람이 성내는 마음을 품는 것은 심히 올바르지 못하다. 비유를 들자면, 청냉한 구름 가운데서 천둥이 쳐서 불을 일으키는 것과 같아서 응할 바가 아니다.

 

​너희 비구들아,

마땅히 자기의 머리를 만져보라. 이미 세속의 꾸밈을 버리고, 가사를 입었으며, 발우를 들고 걸식으로써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보기를 이와 같이 하라. 만약 교만이 일어나거든 빨리 없애야 한다. 교만을 높이 기르는 것은 오히려 세속 사람들로서도 마땅하지 않는데, 하물며 어찌 출가해 도에 든 사람이 해탈하기 위하는 까닭에 스스로 그 몸을 낮추어서 걸식을 행함에 있어서랴.

 

​너희 비구들아,

아첨하는 마음은 도()와 서로 어긋난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 마음을 정직하고 질박하게 해야 된다. 아첨은 단지 속임수이니, 수행(修行)의 길()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음을 단정히 해 질박하고 정직함을 근본으로 해야 된다.

 

​너희 비구들이여,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하는 것이 많은 까닭으로 고뇌도 많거니와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하고자 함이 없어 근심 걱정이 없음을 알아야 된다. 오로지 소욕하기 위해서도 오히려 마땅히 닦아야 하거늘 하물며 소욕이 모든 공덕을 낳게 함에 있어서랴. 욕심이 적은 사람은 아첨으로써 남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 않고, 모든 감관에 이끌리지 않는다.

소욕을 행하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해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고, 하는 일에 여유가 있어 언제나 모자람이 없다. 이렇게 욕심이 적은 사람은 열반의 경지에 들게 되는데, 이것을 욕심이 적음 소욕​(少欲)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모든 고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만족할 줄 아는 것에 대해 관찰해 보라. 만족함을 아는 법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안온(安穩)한 곳이다.

넉넉히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오히려 편안하고 즐겁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록 천당에 있을지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자는 비록 부유한듯하나 가난하거니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한듯하나 부유하다.

만족을 모르는 자는 항상 오욕에 이끌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불쌍하게 여기는 바가 된다.

이것을 만족할 줄 앎 지족​(知足)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적정 무위(寂靜無爲)의 안락(安樂)을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안팎의 심란(心亂)과 시끄러움을 떠나 혼자서 한가한 곳에 있어야 한다. 조용하고 한가한 곳에 있는 사람은 제석천(帝釋天)도 공경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마음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생각과 따르는 사람들을 버리고,

비고 고요한 곳에 홀로 거처해 괴로움의 근본을 멸하려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만일 무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리로부터 괴로움을 받는다.

마치 큰 나무에 많은 새가 모여 앉으면 그 가지가 부러질 근심이 있는 것과 같다.

 

​세간 일에 얽매이고 집착해 여러 가지 괴로움에 빠지는 것은

마치 늙은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멀리 떠남[원리(遠離)]’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만일 부지런히 정진한다면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비유컨대, 작은 물방울도 쉬지 않고 떨어지면 돌을 뚫는 것과 같다.

 

만약 수행인의 마음이 게을러 정진을 쉬게 되면,

마치 나무를 비벼 불씨를 얻으려 할 때,

나무가 뜨거워지기도 전에 그만 두는 것과 같다.

비록 아무리 불씨를 얻으려고 하더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끊임없이 노력함[정진​(精進)]’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선지식(善知識)을 구하고, 잘 도와주는 사람을 구하는 것[선호조(善護助, 선한 호법자)]은 생각을 오롯하게 해 알아차림이 지속되게 하는 것만 못하다. 만약 알아차리는 상태가 흩어지지 않고 지속하면 모든 번뇌의 도적이 능히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항상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염()을 거두어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잘 살펴야 한다.

만일 알아차려 각찰(覺察)하는 힘을 잃어버리면 모든 공덕을 잃어버릴 것이며, 만일 알아차리는 힘이 굳고 강하면 비록 오욕(五欲)의 도적 속에 들어가더라도 해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유컨대 갑옷으로 무장하고 적진에 나아가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잊어버리지 않는 염 불망념(不忘念)이라한다.

 

비구들이여,

만일 마음을 거두면 마음은 곧 정()의 상태를 이룰 것이다.

마음이 평정상태[()]로 있는 까닭에

세간의 생멸하는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항상 모든 선정을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

 

​만약 선정을 이루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물을 아끼는 집에서 둑이나 못을 잘 관리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또한 그러하여

지혜의 물을 잘 보존하기 위해 선정을 잘 닦고 그 물이 새지 않도록 한다.

이것을 고요함[정​()]’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지혜가 있으면 탐착이 없어지는 것이니,

항상 스스로 성찰(省察)해서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법() 중에서 능히 해탈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수행자도 아니며,

재가신자도 아니므로 무엇이라 이름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한 지혜는 곧 노병사의 바다를 건너는 견고한 배이고,

무명의 어두움을 밝히는 크나큰 등불이며,

모든 병든 자의 좋은 약이고,

번뇌의 나무를 베는 예리한 도끼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문⋅사⋅수(··)의 세 가지 지혜로써 자신을 더욱 증익​(增益)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혜의 비춤을 가졌다면,

비록 그것이 육안(肉眼)이라도

그는 밝게 보는 사람이다.

이것을 지혜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여러 가지로 무익한 희론(戱論)을 일삼는다면 그 마음은 산란해 진다.

비록 다시 출가하더라도 오히려 해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는 빨리 어지러운 마음과 희론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만일 너희들이 적멸의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면 오직 희론으로부터 오는 환난을 잘 멸해야 한다.

이것을 희론(戱論)하지 않음이라고 한다.

 

​ 너희 비구들이여!

모든 공덕에 항상 한 마음으로써 모든 방일(放逸)을 버리기를 마치 원수인 도적을 여의듯 해야 한다.

크게 자비로운 세존이 설하신 바의 이익은 모두 이미 극진한 것이니, 너희들은 오로지 부지런히 그것을 행하라.

혹 산간이나, 혹은 비어 있는 습하고 풀이 무성한 곳이나, 혹은 나무 밑에서나, 한가하고 고요한 방일지라도 받은 바의 법을 생각해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아야 하며, 항상 스스로 부지런히 정진해 닦아야 한다.

한 일도 없이 헛되이 죽으면 뒤에 후회함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마치 훌륭한 의사와 같이 병을 알아 약을 베푸나니,

복용하고 복용하지 않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다.

또 나는 잘 인도하는 길잡이와 같아서 사람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그것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인도하는 사람의 허물이 아니다.

 

너희들이 만약 고() 등의 사성제​(四聖諦)에 대해 의심이 있으면 빨리 질문하라.

품은 의심에 판단을 구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

 

이때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세 번 말했지만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 의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아누룻다(Anuruddha)는 대중의 마음을 관찰하고 부처님에게 사뢰기를, “세존이시여, 달은 뜨겁게 할 수 있고, 해는 차게 할 수 있으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성제는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고성제(苦聖諦)는 실로 고()입니다. 그것을 낙()으로 할 수 없습니다.

집성제(集聖諦)는 진실로 원인(原因)이라. 다시 다른 원인은 없습니다.

()가 만약 멸한다면 즉시 고의 원인이 멸할 것이고,

원인이 멸하는 까닭으로 결과도 멸하는 것이니,

()를 멸하는 길이 실로 진실의 길입니다.

다시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비구들은 이 사성제 가운데서 결정코 의심이 없습니다.

이 대중 가운데 아직 판단함을 갖추지 못한 자는 부처님의 멸도를 보고 당연히 슬픈 감정을 드러내고, 혹은 처음으로 불법에 들어 온 자는 부처님의 설하신 것을 듣고 모두 도탈(度脫)함을 얻었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밤에 번갯불을 보는 것 같이 도를 보는 자가 있으며,

판단함을 이미 갖추어서 고해(苦海)를 건넌 사람은 단지 생각하기를,

세존의 멸도가 한결같이 어찌 이리도 빠른가.’라고 생각했다.

 

​ 아누룻다가 비록 대중이 모두 다 사성제의 뜻을 깨달았다,”라고 사뢰나,

세존께서는 이 모든 대중으로 하여금 다 견고함을 얻게 하고자 대비심으로 다시 대중을 위해 설하셨다.

 

​너희들 비구는 슬프고 괴롭다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

만약 내가 세상에 한 겁을 머문다 하더라도 반드시 멸도하고 말 것이니,

만나서 떠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법에 모두 갖추어져 있느니라.

만약 내가 오래 머물지라도 다시 더 이익 될 것이 없느니라.

 

​응당 제도할 수 있는 자는 천상이나 인간계에 모두 다 이미 제도됐고,

그 가운데 아직 제도되지 못한 자는 모두 또한 이미 제도를 얻을 인연을 지었느니라.

지금부터 이후로 나의 모든 제자들이 쉬지 않고 이것들을 행하면, 여래의 법신이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으리라.

 

​이런 까닭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상이 모두 무상해,

만나면 반드시 떠남이 있는 것이니,

근심과 괴로움을 마음에 두지 말라.

세상의 모양이란 이와 같은 것이다.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하라.

조속히 해탈을 구해

지혜의 밝음으로써 모든 어두운 무지(無知)를 멸하라.

세상은 실로 위태로워 견고한 것이 없느니라.

 

내가 지금 멸도 하는 것은 마치 악한 병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응당 버려야할 몸이며,

죄악의 물건이고,

거짓 이름으로 된 몸이라

 

노병생사(老病生死)의 큰 바다에 빠져있거늘,

어찌 지혜 있는 사람이 그 몸을 제거해 없애기를,

마치 원수인 도적을 죽이는 것같이 기뻐하지 않겠는가?

 

너희들 비구여,

항상 일심으로 부지런히 번뇌를 벗어나는 길을 구하라.

일체세간의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존재는

다 부서지고 파괴되는 불안한 모습이라.

 

너희들은 잠시 조용하라.

다시 말하지 말라.

때는 장차 지나가려 하고, 나는 멸도 하고자 한다.

이것이 나의 최후의 가르침이다.